1. 왕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남자
세종대왕의 이름은 이도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위대한 왕의 모습은 ‘애초에 왕이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도는 원래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 세자 양녕대군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냥 학문만 즐기며 조용히 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형 양녕대군이 문제였습니다. 술, 여자, 사냥을 좋아하던 형은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뜻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죠. 결국 태종은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장자(맏이)인 양녕대군을 폐세자 시키고 셋째 아들 이도를 왕으로 만든 것입니다.
세종은 처음에 왕이 되기 싫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버지 이방원의 무서운 통치 방식과 형의 폐위라는 무거운 그림자 때문이었죠. 그러나 그는 한 번 왕이 되기로 마음먹자, 완전히 다른 세종이 되어 조선의 미래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2. 형과의 묘한 관계, 사실은 끈끈했다
양녕대군은 세종과의 관계가 나빴을까요? 오히려 아닙니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양녕대군은 자주 궁에 드나들며 정치 조언을 해주었고, 세종도 그를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양녕은 궁궐 밖으로 나가서 민간인처럼 살기도 했지만,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며 세종에게 민심을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한글 창제’ 과정에서도 양녕대군이 세종을 돕고 있었다는 야사가 전해집니다. 형제 사이의 정치적 경쟁보다는, 서로를 인정하며 도운 형제의 모습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3. 집현전의 비밀, 천재들 뒤엔 왕이 있었다
세종은 ‘집현전’이라는 학문 연구소를 만들어 수많은 학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 집현전은 단순한 학문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정보기관, 첩보기관의 기능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야사에 따르면, 세종은 신분이 낮은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듣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에게 변장을 시키고 시장이나 마을로 보내 실제 민심을 조사하게 했다고 합니다. 백성의 언어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죠. 이 정보들은 나중에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세종은 학자들에게 토론을 시킬 때, 일부러 서로 의견이 다르게 하도록 유도했다고도 합니다. 싸움처럼 보일 수 있지만, 거기서 더 나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4. 훈민정음, 단순히 글자가 아니었다
훈민정음은 단지 문자를 만든 게 아닙니다. 그 안에는 세종의 철학, 사회에 대한 고민, 약자에 대한 배려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당시 지배층은 한자만 사용하고 있었고, 일반 백성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죠. 세종은 바로 이 점에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도 자신의 말을 글로 쓸 수 있게 하겠다’는 목표로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세종은 실제로 한글을 만든 후에도 반발이 심해 발표를 망설였다고 합니다. 특히 유학자들은 ‘글자가 너무 쉬워서 미개해 보인다’고 비판했죠. 세종은 그럼에도 강행했고, 발표 뒤 몰래 밤마다 한글 사용법을 백성들에게 전파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5. 눈물의 음악, 세종의 마지막
세종은 말년에 눈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됩니다. 당뇨병과 관련된 합병증이었다고 추정됩니다. 그래서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글도 직접 쓰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때조차도 예술을 놓지 않았습니다. 궁중 음악인 ‘정간보’를 만들어 조선 고유의 음악을 체계화했습니다. 한글처럼 음의 높낮이, 길이까지 표현하는 정간보는 지금 봐도 굉장히 과학적입니다.
세종은 마지막까지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기록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악사들이 그의 음악을 연주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6.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세종의 진짜 모습
세종대왕은 단순히 ‘훌륭한 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약자에게 공감하고, 배우려 하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실패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종은 ‘한글을 만든 왕’이지만, 그 이면에는 눈이 멀 때까지 글자를 만들며 밤을 지새운 집념의 인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백성의 눈높이에서 생각했고, 자신의 가족, 형제, 신하들까지도 포용하면서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세종의 이야기는 단순한 왕의 업적이 아닌, 한 사람의 철학과 삶의 궤적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우리가 그를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