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중근, 사람으로 태어나 의사가 되기까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양반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정의감이 강했던 그는 한학을 배우며 인격을 수양했고,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나라가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교사로도 일했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세례명 토마스를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그는 가난한 이웃을 돕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조선의 운명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는 점점 ‘무장 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시기의 안중근은 단순한 청년이 아닌, ‘준비된 독립운동가’로서 자신을 연마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하얼빈, 역사에 남은 7초의 총성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안중근은 다소 덜컥거리는 손으로 총을 들고 있었습니다. 타깃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 당시 일본의 초대 조선 통감이자, 조선을 사실상 지배한 인물이었습니다.
이토가 하차하자마자 안중근은 세 발의 총탄을 날렸고, 그는 현장에서 쓰러졌습니다.
이후 안중근은 도망치지 않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다”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그는 이토를 단지 개인적으로 미워한 것이 아니라, 조선을 멸망시키고 동양 평화를 깨뜨린 자로 보았기에 처단한 것이었습니다.
법정에서 그는 일본 판사에게도 “내가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토 때문이 아니라, 조선을 지키려 한 죄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하얼빈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철저한 정치적 의지와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결단’이었습니다.
3. 우리가 몰랐던 안중근의 진짜 이야기들
3-1. 단지 ‘총 든 의사’가 아니었다
안중근은 단지 이토를 쏘기 위해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동양평화론’이라는 책을 집필하던 중이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 중국, 일본이 서양 세력에 맞서 연합하고, 경제와 교육, 군사까지 협력하여 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자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그는 옥중에서 “나는 조선을 위해 이토를 죽였지만, 그보다 더 하고 싶었던 일은 평화를 위한 협상”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3-2. 손가락을 자른 이유는 단순한 결의가 아니었다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습니다. 보통 이 장면만 기억하지만, 그는 이 행동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도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각오는 총보다 무섭다”는 인상을 일본에 주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혈서를 쓴 뒤, 이를 사진으로 찍어 언론에 배포하길 원했을 정도로 치밀했습니다.
3-3. 김구와의 관계
김구와 안중근은 직접적인 접촉이 많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존경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김구는 안중근 의거를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훗날 백범일지에서 “내가 가장 부러운 사람”이라며 안중근을 언급했습니다.
이 둘은 방향은 달랐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걷고 있었던 독립운동의 두 축이었습니다.
3-4. 일본인 간수의 눈물
안중근이 옥중에 있을 때, 일본인 간수들이 그를 극진히 대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매일 붓글씨를 쓰며, 다른 죄수들과 간수에게도 예를 다했고, 종교적 관용과 인간적인 품격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날, 그를 경호하던 일본 간수가 눈물을 흘리며 “당신은 원수가 아니라, 스승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널리 회자됩니다.
3-5. 그의 죽음과 장례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합니다.
죽기 전 그는 “내가 죽은 뒤 3년이 지나 조선이 독립되지 않는다면, 나를 다시 묻지 말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시신은 끝내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했고, 지금도 어디에 묻혀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안중근 유해 발굴”은 많은 사람들의 오랜 염원이자 역사적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