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윤봉길의 인생사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본래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이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책임감과 강한 의지를 지닌 소년이었다. 그는 한학을 공부하며 유교 경전을 익혔지만, 3·1 운동 이후 나라의 현실을 깨닫고 마음속에 불타는 애국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윤봉길은 ‘농촌 계몽운동’을 위해 월진회를 조직하고 고향 사람들에게 교육과 근대 문물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망은 점점 거세졌고, 그는 ‘지금 내가 밭을 가는 것이 조국에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답은 명확했다. “나라를 되찾는 길에 서야 한다.”
그는 1930년 홀로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김구는 그를 조선혁명군인 양성소에 보내 무장 투쟁의 방법을 익히게 했고, 이는 곧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진다.
2. 윤봉길의 정사 – 상하이 홍커우 의거
1932년 4월 29일은 일본 천황의 생일이었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는 일본군과 조계 당국이 성대한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많은 일본 장성과 고위 관리, 그리고 외국인 귀빈들이 모인 자리였다.
윤봉길은 이날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준비했다. 김구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그는 웃으며 “선생님, 이번 일로 제 목숨은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전 11시 40분, 식이 한창일 때 그는 단상 근처로 다가가 폭탄을 던졌다. 굉음과 함께 일본군 고위 장성이 즉사했고, 다수가 중상을 입었다. 이 의거는 세계 각국에 크게 보도되었고, 중국 장제스는 “조선 청년의 용기는 100만 대군보다 값지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고,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하지만 그의 희생은 조선 독립운동의 흐름을 바꾸었다. 중국과 임시정부 간의 관계는 강화되었고, 무장 투쟁의 필요성은 전 세계에 각인되었다.
3. 잘 알려지지 않은 야사
윤봉길 의거에는 일반 역사책에 잘 나오지 않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다.
첫째, 폭탄 준비 과정이다. 당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은 임시정부 기술자들이 수작업으로 제작한 것으로, 폭발력은 제한적이었으나 근거리 살상에는 치명적이었다. 윤봉길이 선택한 ‘물통 폭탄’은 외형이 평범해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둘째, 의거 전날 밤의 일화다. 김구의 집에서 마지막 만찬을 하던 윤봉길은 평소보다 밥을 많이 먹지 않았다. 동지들이 이유를 묻자 그는 “내일 아침이 마지막이니 속을 가볍게 하려 한다”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셋째, 체포 이후의 태도다. 일본 헌병이 “왜 일본 천황을 죽이려 했느냐”고 묻자, 윤봉길은 “천황은 내 나라를 빼앗은 자의 상징이니, 그를 죽이는 것은 조국을 위한 일”이라고 답했다. 그는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의 순국 후 고향 예산에서는 비밀리에 장례 추도식이 열렸다. 일제의 눈을 피해 밤에 모닥불을 피우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속삭이며 눈물을 삼켰다.
윤봉길의 삶은 짧았지만, 그 불꽃 같은 의지는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길잡이가 되었다. 그는 단지 폭탄을 던진 청년이 아니라, 스스로를 조국에 바친 ‘희생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