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에도 위조화폐가 있었다고?
엽전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한 시대
조선시대, 엽전 하나는 요즘의 천 원, 만원이 아니라 생존의 열쇠였다.
쌀 한 되가 2~3 전이던 시절, 엽전은 단순한 돈을 넘어 권력과 신뢰의 상징이었고, 그만큼 ‘위조’는 엄청난 죄로 다뤄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조선의 골목과 장터, 심지어는 관청 가까이에서도 위조화폐가 조용히 퍼지고 있었던 사실, 알고 있었는가?
2. 정조의 눈을 속인 구리 장인 ‘신술공’
위조의 기술이 예술의 경지에 오르다
정조 시절, 남대문 근처에 ‘신술공’이라 불리던 구리 장인이 있었다. 겉으로는 솥과 주전자를 만들던 평범한 수공업자였지만, 밤이 되면 그는 몰래 위조엽전을 찍는 작업장으로 변신했다.
신술공이 만든 가짜 엽전은 당시 관제 엽전보다도 더 정교했고, 심지어는 관리들이 그의 엽전을 보고 “이건 전라도 관청에서 찍은 것보다 더 낫다”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청동 대신 철에 주석과 납을 섞어 무게를 조절했고, 엽전 글씨는 글씨 잘 쓰는 서생에게 따로 부탁해 직접 새겨 넣었다.
심지어 엽전을 만든 뒤 일부러 일부를 부식시켜 ‘사용된 흔적’까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인색한 장사꾼’ 한 명 때문이었다. 이 상인이 엽전이 가벼움을 눈치채고 관아에 신고했고, 결국 신술공은 금위영 군사에게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그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진다.
“내가 만든 건 엽전이 아니라 조선의 기술이었다.”
3. 조정도 속은 ‘위조화폐 유통상인’
평양에서 출발해 한양까지 퍼진 은밀한 조직
18세기 중엽, 평양에서 활동하던 ‘서씨 상단’은 조선 최초의 위조 엽전 유통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실제 엽전과 똑같은 무게의 가짜 엽전을 대량 제작해 지방 장터에서 은밀히 유통시켰다.
서씨 상단은 평양, 의주, 한성으로 이어지는 물류망을 이용해 각 지역에 엽전을 뿌렸으며, 심지어 일부 수령과 포도청 관리에게도 뇌물을 건네 가짜 엽전 유통을 눈감게 했다는 기록이 야사에 남아 있다.
한양의 전포 중 일부는 ‘위조 엽전 환전소’로 활용되었고, 이곳에 들어갔다 나오는 손님 중 일부는 눈빛만 봐도 장사치가 아닌 ‘무언가 아는 사람’이라 했다.
서 씨 상단의 몰락은 내부 고발자 때문이었다. 한 하인이 상단 장부를 훔쳐 포도청에 넘겼고, 그 덕분에 조직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포도청이 장부를 확보한 뒤에도 일부 고위층은 “경제가 돌아간 건 그들 덕”이라며 그들을 보호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4. 조선 후기 위조지폐 시도
종이돈의 그림자, 가짜 저화와 화폐개혁
조선에서는 15세기 세종 시절부터 ‘저화’라는 종이 화폐가 등장했지만, 종이 자체의 품질이 낮고 유통망이 부족해 오래가진 못했다. 하지만 저화는 오히려 위조범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저화는 관청에서 발행한 문서와 비슷한 모양이었고, 문서 위에 도장을 찍는 형태로 제작되었는데, 당시 한 양반가의 서자는 필사본 위조 저화를 만들어 상단에 유통시키고 있었다.
그는 서울의 장인에게 특별한 먹과 붓을 구해 도장까지 모사해 냈으며,양반 신분이라는 이유로 초기에는 수사망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결국 위조 저화는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한성부는 화폐 개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서자의 위조 저화가 진짜보다 더 유통이 잘 되었다는 점이다.
백성들은 “관이 만든 건 못 믿어도, 저 양반이 만든 건 믿을 만하다”라고 했다고 하니,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신뢰를 얻은 셈이었다.
5. 백성의 창의성과 생존, 그리고 죄의 경계
단지 나쁜 짓이었을까?
조선시대의 위조는 단순히 돈을 만들었다는 죄 이상이었다.
국가의 질서를 위협하는 반역 행위로 여겨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엔 배고픔과 억압 속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민초들의 몸부림도 있었다.
가짜 엽전을 찍던 장인, 위조지폐를 만든 양반의 서자, 돈을 유통하던 상인들까지… 그들은 모두 한 시대의 어둠 속에서 빛을 낸 존재였고, 오늘날로 보면 ‘창의적 범죄자’이자 ‘제도의 한계가 만든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