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비 출신, 하늘의 별을 꿈꾸다
장영실의 출신은 놀랍습니다. 그는 노비였습니다. 아버지는 양반이었지만 어머니가 천민이었기 때문에, 장영실은 태어날 때부터 노비로 분류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노비가 아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기계에 대한 유별난 관심을 보였고, 망가진 물건을 보면 몇 번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고쳐냈다고 합니다.
야사에 따르면 어느 날 장영실이 쌀을 담는 곡식 저울을 고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지나가던 세종대왕이 봤고, 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장영실은 궁으로 불려가 ‘기술 노비’로 활동하게 됩니다.
2. 세종이 아낀 유일한 사람
세종은 장영실을 단순히 기술자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영실을 ‘형제처럼 아낀다’고 표현할 정도로 특별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유명한 혼천의, 자격루, 앙부일구, 측우기 등 조선의 대표 발명품들 대부분이 장영실의 손에서 나왔고, 세종은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세종 사이엔 단순한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야사에는 세종이 한밤중에 장영실을 불러 별자리를 함께 관측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하늘을 보며 과학과 철학에 대해 토론했고, 세종은 장영실에게 “하늘은 신분을 묻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3. 장영실이 만든 시계는 진짜로 시간을 알았을까
장영실의 대표작 중 하나는 자격루, 즉 자동 물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단순히 시간을 알리는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기계가 시간에 맞춰 자동으로 종을 치고, 북을 울리며, 나무 인형이 나와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습니다. 지금의 자동 알람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죠.
야사에 따르면 세종은 이 자격루가 설치된 후, 밤마다 일어나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몰래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는 장영실이 만든 기계 하나하나에 애정을 쏟았고, “이것은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는 도구”라고까지 표현했다고 합니다.
4. 장영실이 만든 기구는 왜 서양보다 먼저였을까
장영실이 만든 측우기는 서양보다 약 200년이나 앞섰습니다.
그는 비가 오면 정확히 어느 정도가 내렸는지를 측정할 수 있도록 기구를 설계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의 농업을 크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놀라운 건, 그는 이를 단순히 개인의 업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기술을 지방 관리들에게도 널리 전파했고, 실제로 전국 각지에 측우기를 보내어 농업 행정을 도왔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장영실은 측우기를 개발한 뒤 “하늘의 물도 나누어 써야 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과학을 권력의 도구로 삼지 않고, 백성을 위한 도구로 삼은 인물이었습니다.
5. 장영실의 마지막, 기록에서 사라지다
조선의 수많은 과학 유산을 남긴 장영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정사에는 ‘왕이 타던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났고, 그 책임을 장영실이 지게 되었으며 이후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과 민간에서는 이 기록을 믿지 않습니다.
야사에는 그를 시기한 신하들, 특히 양반 중심의 체제에서 천민 출신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불편해한 일부 세력이 장영실을 몰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또 다른 야사에서는 장영실이 감금된 뒤, 비밀리에 기술서들을 정리하다가 병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의 무덤조차 어디에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고,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금기처럼 조선 사회에서 잊혀졌습니다.
6. 500년 뒤, 다시 불린 이름
장영실이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 그의 발명품들이 재조명되며 한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복원되고, 장영실의 이름도 다시 빛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장영실상’이라는 과학기술 관련 최고 권위의 상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고, 그는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500년 전, 신분을 넘고 과학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남자. 그가 오늘날 학생들에게 다시 ‘과학의 길’을 꿈꾸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