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의 마음을 훔친 왕, 공민왕
개혁의 칼을 들고 백성을 마주한 왕
고려 후기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왕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의외로 ‘공민왕’을 떠올리는 사람이 적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은 그를 ‘참된 임금’이라 불렀고, 그의 죽음을 두고 마을 어귀마다 ‘왕이여, 다시 태어나소서’라는 글귀가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권문세족과 원의 기득권에 맞섰다. 하지만 그보다 백성들이 열광한 이유는, 그가 직접 시골을 순행하며 굶주린 이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호패제를 통해 부당한 병역을 정리했다는 점이다.
한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은 개성 근처를 돌며 양민으로 위장한 노비들을 몰래 풀어주고는 “나라가 백성을 위하는 척만 하지 말고 진짜 위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은 당시 사관들이 기록하길 꺼려했고, 결국 야사 속에만 전해진다.
그는 개혁 중 정적에게 암살당했지만, 한양의 비각에는 그의 영정을 걸고 몰래 제를 지낸 마을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마을은 훗날까지도 왕조가 바뀌는 날에는 “공민왕이 다시 오셨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2. 조선의 스타 군주, 세종대왕
글로 백성을 품다
세종대왕이 위대한 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종은, 백성들이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난다’고 말한, 진짜 백성의 왕이었다.
어느 겨울, 한 노인이 궐 근처에서 얼어죽은 일이 있었다. 세종은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직접 그 집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눈물 흘리며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더 따뜻했더라면 저 노인이 살았을 텐데…”
또한 세종은 상소문이나 보고서를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람을 불러 음성으로 읽게 했고, 눈이 안 보이거나 글을 못 읽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반포했다.
그의 이런 배려는 궁궐 바깥에서도 전해졌다. 서울 북촌의 한 한옥에서는 해마다 세종 탄신일에 그의 모습을 조각한 작은 상을 꺼내놓고, 민간제사를 지낸 흔적이 남아 있다.
세종이 죽었을 때, 전국에서 울음 소리에 소가 밭을 멈췄고, 송장을 따라 개경까지 따라간 백성이 수천 명에 달했다는 야사도 있다.
3. 이름 없는 인물, 그러나 백성의 영웅 ‘이춘길’
사라진 장터의 의인
조선 영조 시대, 충청도 공주 근방에 ‘이춘길’이라는 이름 없는 평민이 있었다. 그는 글도 배운 적 없고 관직도 없었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자청해 지방 수령을 찾아가서 “세금 고지서에 틀린 글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직접 계산한 세금 장부를 들고 관청에 항의했고, 심지어는 세금을 내기 전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 “무엇을 내는지를 알아야 낼 수 있다”라고 설득했다.
어느 날, 한양에서 내려온 암행어사가 그의 소문을 듣고 몰래 찾아와 그의 행적을 조정에 보고했고, 정조는 그를 몰래 불러 칭찬한 뒤 그의 집 마당에 작은 서당을 지어주었다는 기록이 야사로 전해진다.
그는 결국 말년엔 병든 백성들을 위해 약초를 캐며 살았고, 죽은 뒤에는 이름조차 비석에 올리지 않고 묘비에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남을 살리고 자신은 묻었다’
4. 민심을 살핀 진짜 리더의 조건
권력보다 백성을 택한 사람들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백성들이 진심으로 존경한 사람들은 ‘권력으로 다스린 이들’이 아니라 ‘눈높이를 맞춘 이들’이었다.
공민왕은 권세보다 정의를 택했고, 세종은 지식보다 따뜻함을 앞세웠으며, 이름 없는 이춘길은 백성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사랑을 받았다.
우리는 이들의 정사를 통해 ‘훌륭한 정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법이나 형벌이 아니라,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