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나라가 셋이었던 때가 또 있었을까요?
바로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태봉)**가 서로 다투던 후삼국 시대예요.
오늘은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후삼국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후삼국 시대는 언제일까요?
통일신라가 무너져 가던 9세기 후반~10세기 초
나라 안팎이 어지럽던 시기에
각지에서 새로운 나라들이 등장했어요.
- 후백제: 견훤이 세운 나라
- 후고구려(태봉): 궁예가 세운 나라
- 신라: 오래됐지만 쇠약해진 나라
이렇게 셋이 서로 싸우고, 연합하고, 배신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시기를 우리는 후삼국 시대라고 불러요.
이야기① 궁예는 왜 스스로 미륵이라 불렀을까?
후고구려(태봉)의 왕이었던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 즉 세상을 구원할 부처라고 불렀어요.
그는 어릴 때 신라 왕족의 피를 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버려져서 절에서 자랐고,
나중엔 스스로 왕이 되어 전국을 점령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는 종교적인 왕이 되어
“나는 인간이 아니라 부처다”라고 선언했어요.
사람들은 처음엔 감동했지만,
점점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모조리 처형했어요.
그의 눈빛이 이상해지고, 밤마다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는 기록도 있어요.
결국 궁예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고 왕좌에서 쫓겨났어요.
이야기② 견훤의 아들은 왜 아버지를 배신했을까?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지금의 전라도 지방에서 큰 세력을 이룬 무장이었어요.
그는 백제를 부활시키겠다는 꿈을 꾸며
스스로 왕이 되었고,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의 아들 신검은 아버지를 믿지 않았어요.
왜냐면 견훤이 다른 부인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려 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신검은 자신의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어요.
이 장면은 정말 슬퍼요.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
가족이 서로를 의심하게 된 비극이죠.
이야기③ 궁예가 경계했던 송악 청년, 왕건
왕건은 원래 궁예의 부하였어요.
궁예가 만든 나라 후고구려에서
해상 무역과 군사 작전을 맡았던 인물이었죠.
하지만 왕건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너무 많았어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왕건 장군이라면 믿고 따를 수 있다”는 말이 있었대요.
궁예는 그걸 질투해서
왕건을 몰래 죽이려 했지만,
신하들이 먼저 알아채고
왕건을 왕으로 세우며 궁예를 몰아냈어요.
왕건은 후에 나라 이름을 태봉 → 고려로 바꿨어요.
이야기④ 신라의 마지막 왕은 왜 왕건에게 나라를 넘겼을까?
통일신라가 너무 약해지고
백성들이 떠나가던 시절,
마지막 왕 경순왕은 고민을 했어요.
“계속 버티면 피만 더 흐르겠구나…”
그래서 그는 왕건에게 직접 사신을 보내고 항복했어요.
자신은 스스로 신라의 마지막 왕이라 선언하고,
백성들이 고려로 편하게 넘어가도록 길을 열어줬어요.
이 일은 전쟁 없이 마무리되었지만,
경순왕은 그 뒤로 마음의 병을 얻고
외롭게 생을 마쳤다고 해요.
이야기⑤ 왕건이 견훤을 구한 이유는?
왕건은 후백제와 전투를 하며
한때 큰 위기를 겪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견훤이 몰래 왕건에게 협조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요.
이유는 아들 신검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에요.
왕건은 견훤을 받아주고
후백제를 치러 갈 때 앞장서게 해요.
전쟁 후, 견훤은 눈물을 흘리며
“내가 낳은 자식보다, 나를 적으로 알던 왕건이 더 의리가 있다”고 했대요.
이야기⑥ 후삼국의 통일은 칼보다 마음으로?
왕건은 마지막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켜요.
이로써 후삼국 시대는 끝나고 고려가 통일을 이루게 돼요.
하지만 왕건은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적의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어요.
- 후백제의 신하들을 포용하고
- 신라 귀족들도 받아들이고
- 궁예의 유민들도 새 터전을 주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무기를 놓고 사람을 얻은 왕”**이라 부르게 되었어요.
후삼국 시대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후삼국 시대는 혼란과 싸움의 시기였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감정, 배신, 충성, 용서가 모두 담겨 있어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궁예의 광기, 견훤의 슬픔, 경순왕의 결단, 왕건의 포용은
모두 역사의 진짜 모습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