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조선시대 공천 제도의 진짜 속사정, 숨겨진 권력의 배후
1. 공천이란 무엇인가요
조선시대에도 ‘줄’ 없이는 못 올라갔다
오늘날 ‘공천’이라 하면 정당이 선거에 나갈 후보를 선정하는 과정이라 이해되지만, 조선이나 고려 시대에는 ‘관직을 추천받거나 임명되는 것’을 뜻했어요. 쉽게 말해 “누가 누구를 밀어주느냐”에 따라 벼슬길이 결정되던 것이죠.
하지만 공정한 시험인 과거제도가 있었던 시절에도 실제 공천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음성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과연 그 실상은 어땠을까요?
2. 고려시대 공천의 실태
시험보다 무서운 ‘문벌 귀족의 장원 대물림’
고려시대의 공천은 대부분 문벌 귀족의 사적 추천이었어요. 특히 개경의 몇몇 가문은 국왕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내정권’을 행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경원 이 씨 가문은 4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하며 “시험은 형식일 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죠.
당시 귀족들이 모여 ‘천거서’를 작성해 왕에게 올렸는데, 그 서류에는 이름 외에도 추천인과 인척관계, 지참 금품까지 쓰여 있었던 기록도 전해집니다.
이러한 관행에 대해 묘청은 “문장으로 백성을 감동시키기보다는, 은전으로 임금을 감동시킨다”며 비판했다고 전해져요.
또한 지방 출신의 천재가 과거 시험에서 장원을 해도 중앙 귀족의 공천이 없으면 7품 이상 진급이 불가능했으며, 결국 지방관으로 밀려나 시골을 떠돌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3. 조선 초 ‘정도전 라인’의 무서운 줄세우기
개혁의 얼굴 뒤에 감춰진 정치적 공천술
조선 건국 초, 정도전과 그의 동지들은 개혁과 유교 질서를 내세웠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사람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는 데 매우 능숙했어요. 이른바 ‘정도전 라인’이라는 말이 조선 정치 초기에 회자될 정도였죠.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도전은 성균관 출신 젊은 유생들 중 마음에 드는 자를 비공식적으로 불러 면접을 보고, ‘이 사람 쓸 만하네’ 하면 왕에게 직언 형식으로 추천했습니다.
어느 날은 정도전이 한 유생의 집을 직접 찾아가 술상을 받으며 “내가 조정에 자리를 하나 만들었는데, 자네 생각이 나는구려”라고 말했다는 야사도 전해져요. 마치 드라마 속 장면 같지만, 이런 식의 ‘은밀한 공천’이 당시 관직 인사의 현실이었죠.
4. 조선 중기 공천의 암투와 붕당의 시작
서인과 동인의 ‘줄다리기’가 낳은 인사 참사
조선 중기에는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고, 공천도 정치적 편 가르기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헌부’나 ‘사간원’ 같은 언론기관조차 붕당과 연결되어 공천을 둘러싼 논쟁에 휘말렸어요.
선조 25년, 이산해는 동인의 추천을 받아 이조판서가 되었고, 서인의 실력자였던 유성룡은 “왕이 아니라 붕당이 인재를 만든다”며 탄식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정한 과거시험은 점점 유명무실해졌고, 공천 싸움이 ‘성균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돌기도 했어요.
심지어 붕당끼리 서로 상대편의 추천 인물들을 음해하기 위해 가짜 스캔들을 퍼뜨리고 사주한 기생을 이용했다는 야사도 남아있습니다.
5. 몰락한 선비의 복수극, 공천을 뒤흔든 사문난적 사건
이름 없는 자의 칼날이 조정을 바꾸다
정조 시대에 기록된 한 야사에 따르면, 무명 선비 박문필은 공천에서 번번이 배제된 끝에 ‘문제적 시’를 써 조정에 투서합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죠.
“문장은 물처럼 흐르되, 권세는 돌처럼 흐르니 / 글이 열이라도 힘 하나 못 이기고 / 붓은 칼을 이기지 못하니, 사대부의 칼끝은 추천서라”
이 시는 백성들 사이에 퍼졌고, 정조가 직접 그 시를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조정을 바로 세울 자”라며 그를 발탁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이 일화는 당시 공천 제도의 불공정을 고발한 민간의 저항이기도 하죠.
고려 조선의 공천, 과연 달라졌을까
공천이란 말은 현대에도 여전히 무겁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권력의 그림자 아래서 사람을 뽑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었죠.
고려의 문벌 귀족, 조선의 유림 정치, 붕당의 권력싸움, 그리고 무명의 시인까지…
공천은 누가 권력을 쥐느냐를 넘어, 누구의 이름이 역사에 남느냐를 결정짓는 가장 은밀한 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