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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가장 뜨거웠던 날, 역사 속 불볕더위 이야기

tslog 2025. 8. 16. 02:00

조선 시대 가장 뜨거웠던 날, 역사 속 불볕더위 이야기
조선 시대 가장 뜨거웠던 날, 역사 속 불볕더위 이야기

1. 조선 왕조실록에 기록된 ‘숨 막히는 여름’

 

조선 시대에도 무더위는 사람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오늘날처럼 기상청이 날씨를 매일 발표하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조선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당시의 기상 상황이 종종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가장 더웠던 날’로 꼽히는 몇몇 기록들은 읽는 사람조차 땀이 나는 듯한 생생함을 전합니다.

 

1627년(인조 5년) 7월, 한양의 온도가 기록상 가장 높았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섭씨’로 표기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무 그늘에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말과 소가 모두 혀를 내밀었다”라는 묘사가 있습니다. 심지어 궁궐 안에서 일하던 내관들이 더위로 쓰러져 일손이 마비되었다고 하니, 그날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2. 얼음을 둘러싼 여름 전쟁

 

조선 시대 여름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냉방 장치가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대신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氷庫)’가 국가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겨울에 한강에서 얼음을 잘라 보관하고, 여름이 되면 왕실과 고위 관료에게 나누어주었죠.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더운 해에는 얼음이 모자라 왕실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1751년(영조 27년) 여름, 폭염이 길게 이어지자 얼음 창고의 재고가 일찍 바닥나버렸습니다. 그 결과 일부 대신들이 왕의 눈치를 보며 얼음을 조금씩 아껴 쓰는 ‘얼음 절약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얼음을 얻지 못한 평민들은 ‘차가운 우물물’이라도 마시기 위해 줄을 서야 했고, 일부는 산속 바위 밑의 서늘한 바람을 쐬기 위해 나들이를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3. 더위가 만든 정치 사건

 

더위가 단순히 날씨 문제가 아니라 정치에까지 영향을 준 사례도 있습니다. 1453년(단종 1년) 여름, 김종서와 수양대군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 기록에 따르면 연일 35도를 웃도는 폭염이 이어졌습니다. 뜨거운 날씨에 대신들의 회의가 길어지면 모두 지쳐서 제대로 된 토론이 어려웠고, 수양대군은 이를 틈타 빠른 결정을 유도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이 폭염이 정치 상황의 흐름을 바꾸는 ‘보이지 않는 변수’였을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4. 한양 사람들의 폭염 생존법

 

오늘날의 ‘냉방병’처럼, 조선 사람들도 무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의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우선 양반가에서는 대청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창호를 활짝 열어 바람을 통하게 했습니다. 부채질은 기본이었고, 연못가나 시원한 계곡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죠.

 

평민들은 ‘초계탕’ 같은 냉육수를 먹으며 더위를 이겨냈고, 아이들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놀았습니다. 특히 양반가의 여인들이 은밀히 즐긴 것으로 ‘빙과(氷菓)’가 있었는데, 이는 얼음을 잘게 부수어 과일즙과 꿀을 넣은 일종의 옛날 빙수였습니다. 왕실과 상류층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귀한 간식이었죠.

 

 

5. 가장 뜨거운 날이 남긴 기록

 

정조 16년(1792년) 여름, 경기 일대에서 폭염과 가뭄이 동시에 찾아왔습니다. 이 해의 기상 기록은 유난히 상세한데, 낮에는 뜨거운 바람이 불고 밤에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농작물은 타들어갔고, 우물물마저 줄어들어 백성들은 ‘하늘이 노한 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폭염 속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부채 하사령’을 내려 궁궐의 부채를 나누어주었고, 얼음을 운송하는 군사들에게 특별히 시원한 물과 음식을 제공하라고 명령했습니다.

 

 

6. 지금과의 비교

 

현재 우리는 에어컨, 냉장고, 시원한 음료, 얼음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은 자연과 맞서며 지혜롭게 더위를 견뎌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폭염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고, 때로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는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더위를 피하려는 방법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지만, 이를 감당하는 방식은 시대의 기술과 문화에 따라 크게 달랐다는 점입니다.